잡초비전(雜草秘傳) – 초식 24

김제민 개인전 잡초비전(雜草秘傳) – 초식 24

2012. 9. 16 9. 21

작업노트

나의 작업에서 자주 보이는 소재는 풀, 나무 등 식물들이다. 나는 식물을 자연의 대표자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 그림에서 식물들을 의인화하여 환경 또는 자연의 대변인으로 삼고자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식물은 정지되어 거의 움직임이 없고 한 곳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식물은 그 만의 느린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의 입장에서 인간이나 여타의 동물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비록 식물은 눈이 없지만) 빠르게 지나다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식물은 개체수로 보나 산소와 영양소를 생산해 내는 기능으로 보나 실질적인 지구의 주인이며 생명의 원동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식물을 의인화하여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한 작품은 유머로 읽힌다. 나는 내 작품이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뼈가 있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식물과 같은 소소한 소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하거나 역설적인 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 때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한 번쯤 꼬거나 뒤집어서 보여주려고 한다. 특히 많이 다루는 주제는 획일한 것에 대한 비판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인데, 이는 잡초라는 소재를 통해 흔히 표현되곤 한다. 잡초는 농사꾼에게는 제거의 대상이지만 엄연히 없어서는 안 될 다양한 생명체 중의 하나이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버티고 살아간다. 이것은 꽤나 아름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작품에서 잡초를 나의 분신쯤으로 여기기도 하고, 자화상과 동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연약해 보이는 풀과, 그것이 가질 수 있는 힘 또는 끈질긴 생명력은 작품 속에서 대조를 이루며 주제를 더욱 부각시킨다. 나는 연필, 수채화, 먹과 같은 가벼운 재료와 일견 허술해 보이는 운필법이 내가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잡초 호신술 비전”은 연약한 식물들이 각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마치 무술서의 장면처럼 표현해 본 작업이다. 풀 또는 나무들이 의인화되어 다양한 무술 동작을 하고 있는 이 드로잉 연작은 김을 매려는 누군가의 호미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자신을 베려는 낫을 피하는 기본적인 동작에서부터,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황당무계한 권법 초식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잡초들의 이러한 가련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몸부림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거대한 폭력이나 획일성, 부조리 앞에서 속수무책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 제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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