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wait! There’s more

전채강 개인전

2013516() ~ 620()

인간의 언어에 특이한 미덕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그러한 도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화자에게 비워주는 자리에 있다.

–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언어의 성사>, 새물결, p146

전채강을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갤러리 정미소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였다. 작품을 먼저 보고,오랫동안 준비해서 느즈막히 데뷔한, 중년의 과묵한 작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고 붓질만큼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꽤 놀랐다. 이런 저런 대화의 끝에 나는 ‘내가 갤러리를 운영하게 되면 꼭 같이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5년 후, 전채강은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나름의 세계를 만들었고 나는 기어이 작은 갤러리를 꾸리게 됐다. 그리고 생각난 약속.

이 전시는 5년을 묵힌 약속의 실천이고, 그래서 어쩌면 작가보다 갤러리가 더 설레는 전시다. 글에 빈번히 ‘내’가 등장하는 이유다.

고백하자면, 5년 전의 약속은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사실 나는 나이가 어린 작가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이 작품에 고스란히 ‘쏟아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캔버스 앞에서 그 ‘말의 성찬’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얼 먼저 들어야 할 지, 어떤 말에 집중해야 할 지 알아채기도 어렵다. 그 편견의 밖에 있던 5년 전 전채강의 작업 방식은 대체로 말을 ‘골라내는’ 형태였다. 화면 가득 ‘오늘날의 사건 사고’를 뿌려놓고, 그걸 다시 큰 이미지로 덮어버리거나 거칠게 뭉개버리는 방식은 분명 여느 또래 작가들과 달랐다. 자신감인지 노숙함인지 모를 그 ‘다름’이 내가 전채강의 작품에 주목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고, 지켜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5년 전 나는 내가 본 그 ‘다름’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고, 그 확인을 통해 끝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두 번째 개인전의 작품을 보며 즐거워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 때 나는 독립큐레이터라는 직함의 반 백수였고 전채강은 여러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주목하는 작가로 성장해 있었다. 내가 ‘어떤 전시를 기획할까’, 보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이 더 클 때, 전채강은 또 다른 작품을 들고 나와 있었다. 먼 곳에서 관조하던 작가의 시선은 어느새 사람의 살 가까이까지 내려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시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자신감도, 그 결과물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줌-인(zoom-in)해 들어간 작품이 전작들과 달리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기뻤다. 줌-인과 줌-아웃(zoom-out)을 무리 없이 해냈다는 사실과, 그 작업이 가능한 작가라는 확인을 통해 나의 첫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던 게다. 서걱대는 눈길로 먼 곳을 바라보던 작가가 사람의 표정을 훑으며 비로소 뜨거움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전기수 마냥 능란하게 이야기를 하던 작가가 남의 이야기를 통해 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재주를 만들어 냈다고 믿었다. 비로소 대화의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전채강의 세 번째 개인전. 여전한 듯 낯선 작품 앞에서 나는 또 말을 삼킨다. 새로운 매체가 사용되기도 하고, 흩뿌려진 이미지들이 불편하기도 하다. ‘전채강스러움’,을 찾으려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이전의 전채강을 닮지도 않았다. 첫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상이함이 예전 전채강의 작업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그 이유를 소설가 편혜영이 2013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쓴 후배 작가 김애란에 대한 글 ‘작가론 :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의 한 문장을 통해 짐작하고 싶다.

소설을 쓰는 일은 결국 최선을 다해 세상과 사람을 짐작하려는 어떤 태도라고 생각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전채강 작업의 전조는 두 번째 개인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줌-인과 줌-아웃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대화의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전채강은 거기서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전채강은 세상과 사람을 짐작하려는 태도와 형태를 조금 넉넉하게 가지고 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시선과 선택이 작품의 중요한 이미지를 결정하던 것이 이전 전채강의 작업이라면, 2013년의 그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작품 속에는 작가의 말이 흩뿌려진 것이 아니라 담아야 할 다른 이들의 말들이 쌓여있다. 작가가 판을 벌이면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쌓고, 뿌리는 느낌이다.

작업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작가는 ‘거리 두기’란 단어를 종종 사용했다. 속내를 그대로 내보이고,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하는 것보다 직접 깔아 놓은 멍석 위에 쌓일 남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편혜영의 글로 돌아가자면, 짐작의 주체가 확장되어 작가 뿐 아니라 세상과 사람 역시 작품 안에서 ‘태도’와 ‘역할’을 갖는 작업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전채강의 새 작업에서 흩뿌려진 이미지 사이의 틈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 틈이야 말로 작가의 속내고, 하고 싶은 말이며 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태도다. 일련의 성장통 끝에 작가가 얻은 성찰, 혹은 통증의 결과물은 유려하게 말하는 재주가 아니라 잘 들을 수 있는 청자로서의 그것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갤러리 버튼 함 성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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