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들의 생활백서

김제민 개인전 <잡초들의 생활백서>

2013. 11. 6 – 11. 26

풀이 눕는다

풀과 사람을 엮어 표현하는 것은 비단 동양권 문화에서만은 아닌 듯 하다. 일례로 우리에게 익숙한 민초(民草)라는 표현과 더불어 영미권에도 같은 의미로 grass roots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김제민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은 그렇게 흔한 의미로 사용된다. 2005년에 열린 개인전 타이틀이 <잡초에 대한 오마주>였으니 풀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풀의 일생에서 사람의 인생을 발견하는 작업이 시작 된 것도 8년 이상일 것이다. 그는 작품 속 잡초에 현대사회의 권력자들을 투영시키지는 않는다. 죽자 사자 도망치고, 숨고, 위장하고, 밟히고, 상대에게 별 위해도 안 될 공격을 하는 흔하고 뻔한 필부의 삶이 보일 뿐이다. 바람이 불면 제일 먼저 누워버리고, 해가 좋으면 가장 먼저 일어나 팔을 벌리는 잡초와 우리는 얼마나 닮았나. 비단 김수영의 시를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보도블럭 사이에서 자라는 잡초에서 제 자신을 본다.

풀에 대한 관심은 그가 살던 수유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게다. 지금이야 서울 강북구 일대에서 가장 번쩍대는 거리 중 하나가 되어있지만 사실 수유리는 오래 전부터 서울권 등산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동네였을 만큼 산이 가까운 동네였으니까. 다만 어린 김제민의 눈에 비친 풍경을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진 유일한 이유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그가 풀의 일생에 인간의 삶을 대입시켜 바라봐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인간과 인간사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뼛 속 깊이 점철된 인간인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평범하고 흔한 사람일 뿐이다. 그의 작품 속 풀은 그렇게 우리를 닮았고, 작가 자신을 닮기도 했다.

현명한 힘 빼기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일 먼저 웃음이 나오고, 잠시 후 작품의 의미를 ‘이런 글 없이도’ 이해하게 되며, 마지막엔 작품의 형식에 대해 의문이 든다. 특히 2012년에 열린 개인전 <잡초비전24>의 경우는 더 그렇다. 종이 위에 먹으로 대강 그린 듯한 잡초의 이미지도 모자라 친절하게 작품 제목까지 써 넣은 작품을 보면 ‘직관적’이라는 말도 모자라다. 이번 전시에는 판화 작품들도 선보이는데 슥슥 그어나간 선의 가벼움은 여전하다. 판화와 드로잉, 사진 등 여러 매체를 이용해 작품을 하고 있지만 매체불문 공통적으로 툭툭 내던지는 듯한 가벼움과 그것에서 비롯된 넉넉함이 돋보인다. 컨템포러리라는 근사한 말로 명명된 근래 미술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읽히지 않으니 어렵고, 어려우니 다가가기 어렵다. 애초에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갤러리에 들어와 작품을 감상하고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일’이다. 김제민의 작업이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거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운필의 힘이다.

미술작품은 남다른 아우라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김제민의 작품은 지나치게 대중적이거나 가볍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의 아우라가 위치한 곳, 혹은 발현한 곳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러한 오독은 근거를 잃는다. 그의 작품을 두고 ‘형식이 부여한 아우라와 작품의 내용이 가진 아우라’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그는 후자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힘이 발생하는 곳은 이미지 뒤편에 있다. 김제민의 의도된 힘빼기가 현명한 이유다. 흔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작품이 굳이 어려울 이유가 없다.

클리쉐는 힘이 세다

그러나 간명하고 직관적인 그의 작업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사람을 풀, 특히 잡초에 비유하는 것은 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사용돼 온 아주 오래된 클리쉐 중 하나다. 좋은 대학을 두 곳이나 나와서, 지금은 박사과정을 밝고 있는 작가가 굳이 클리쉐를 작업에 끌어들이는 것은 의도된 힘빼기를 논하기에 앞서 되려 어떤 ‘오해의 장벽’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해 온 작업을 2013년 말에 다시 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김제민은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재의 시기에 만들어져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주입된 실체 없는 ‘단일민족’의 신화는 ‘혼혈’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의미를 덧입혔다. 오랫동안 혼혈이라는 말은 대체로 상대를 비하하거나 업신여기기 위해 사용되곤 했고, 그 흔적은 지금도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 못나고 부끄러운 흔적은 다수의 혼혈인들을 강제로 디아스포라로 만들었고, 이 강제적 디아스포라들은 지금도 양산되고 있다. “그러므로 김제민은 시대가 만든 강제적인 디아스포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혼혈인의 작품에 감화, 감동받아 마땅하다.”는 억지를 부리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의 개인사가 작품에 보이는 클리쉐를 어떻게 이해할 지에 대한 가이드맵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잡초의 생태를 살펴봐야겠다. 잡초는 씨앗을 날려 번식한다. 씨앗이 떨어지는 곳이 잡초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사람이 뽑아 없애기 전에 다시 씨앗을 날려 세대를 이어간다. 발붙이고 사는 곳이 제 집이고, 영역이다. 조그만 틈이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잡초들의 삶은 이어진다. 김제민의 삶도 그러했을 터다.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태어나 강북구 수유리에 자리를 잡고 40여 년을 살다, 이제는 방배동 어디쯤에 자리를 잡은 그의 삶은 (이사한 거리를 떠나서) 그야말로 잡초의 삶이다. 보통사람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잡초는 클리쉐에 불과하지만, 혼혈인으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작가 개인의 삶이 다시 한 번 중첩된 잡초의 이미지는 남다르다. 김제민은 잡초를 통해 ‘매우 일반적인 보통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자기 자신에 덧씌움으로써 작가 자신에게 일종의 대명사 역할을 부여함과 동시에 작가 본인의 남다른 성장과정을 일반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잡초와 보통사람과 나는 같은 존재다’, 라는 명제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아울러 풀을 이용해서 보통사람의 삶을 표현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남으로써 잡초와 작가, 그리고 일반대중을 동일시하는데도 성공을 거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품의 감상자와 작가, 그리고 작품의 거리는 극적으로 좁혀진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관찰하는 타자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스스로 관찰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것.

그래서 김제민의 작품은 사회와 인간, 그리고 작가 자신에 대한 꼼꼼하고 진중한 관찰일기이며 동시에, 긴 시간 내재된,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실현된 욕망-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존재로서의 자아를 인정하고, 인정받기 원하는-의 예술적 재현이기도 하다.

– 갤러리 버튼 함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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