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꽃

임현희 개인전 <천 개의 꽃>

2014. 3. 7 – 3. 28

 

 

천 개의 꽃, 하나의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야기들

아무리 물어도 작가는 ‘글쎄요’ 혹은 ‘그냥’ 이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아니, 일관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 무언가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감추거나 숨기기 위해 하는 대답으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일관했다고 말하려면 그 애매모호한 대답 뒤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어야 했다. 숨기려는 의지. 이도 저도 아닌 대답 뒤에는 그게 없었다. 궁금했다. 왜 그리는지, 무엇을 그렸는지, 그리고 작업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 따위의 일반적이고 당연한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는 작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하는 내게 임현희는 뜬금없이 ‘저는 좀 단순해요.’라는, 대답도 뭣도 아닌 말을 했다. 단순한 사람이 그냥 그린 그림 이라기엔 그녀의 작업이 가진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왜, 어떻게, 무엇을’ 따위의 의문부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녀의 작업이 겪은 변화의 궤적과 폭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다. 임현희가 영국에 체류할 당시의 작품들은 신화와 현실, 상징과 은유, 삶과 죽음이 뒤섞인, 세심하고 환상적이며 멜랑콜리melancholy한 페인팅이었다. 당시의 전시 서문들을 살펴보면 여성성에 대한 언급이 잦은데, 실제로 당시의 작업들은 얼핏 가이아 이론의 지구어머니mother-earth를 연상시킬 만큼 자연에 신성을 부여하고, 작품에 등장하는 식물과 새들이 창조주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된다. 정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세밀한 붓터치, 많은 색을 사용한 당시 작품들은 관람객들에게 더 가까이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많은 요소들이 각각 은유의 대상을 갖고, 그 대상들이 모여 신화의 일부를 재현하는 당시 작품들은 그야말로 알레고리allegory의 숲이었다.

 

귀국 후 임현희는 작업에 일련의 부침을 겪었던 것 같다.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오랫동안 해 온 작업에 익숙해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시기를 거치는 동안 애정과 더불어 의심도 커졌으리라. 영국에 도착한 직후 시작된, 영국 체류 시절의 오롯한 감성을 담은 작업이 국내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당연한 의심이었고, 시의 적절한 부침이었다. 때마침 그녀는 손목을 다치게 되는데,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면, 나의 마지막 그림은 무엇이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비로소 임현희의 진정한 ‘한국에서의 첫 작업’이 시작된다.

 

영국 체류 기간 중의 작업을 임현희의 1기라고 할 때, 그녀의 2기는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작품의 이미지 자체부터 다르다. 1기 작업들이 이미지에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작업이었다면, 최근의 작품들은 훨씬 직관적이다. 뚜렷했던 작업의 이유와 소재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순간 느꼈던 감정의 일부로 바뀌었다. 다만 숲과 새의 이미지가 단순히 지구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1차적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니듯, 거칠게 그어 쌓아 올린 붉은 선이 그저 꽃의 추상화抽象化는 아니라는 점에서 두 시기의 작품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작업을 설명하며 종종 ‘섹시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섹시함 즉 관능미官能美는 수태受胎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이며, 즉 생명 탄생의 가장 첫 자리에 위치한 원초적인 감정 혹은 양태라는 점에서 임현희의 ‘섹시하다’라는 단어가 단순히 통속적인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알레고리로 가득 찬 숲이든 붉은 꽃이나 화염이든 그녀의 시선은 그 뒤에 숨은 한 지점을 향하고 있는데, 신화와 원시의 숲으로 표현된 원초적인 생명력 혹은 거칠게 불타고 있는 태양이나 화염으로 표현된 태초의 에너지가 그것이다. 임현희의 작업을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원초적 에너지에 대한 동경, 혹은 태초의 생명력에 대한 탐구’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기

말이 많은 시대다. 사회도, 개인도, 작가도 그렇다. 작업을 막 시작한 작가들일수록 일단 한 번에 작업노트를 이해하기 어렵고 남의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하여 작업을 풀어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으며 간혹 그 둘이 합쳐져서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녀의 작업은 온전히 그녀 자신의 이야기다. 스타일만 놓고 보자면 근대 일본의 사소설에 가깝다. 작업노트에는 흔한 작가로서의 롤모델이나 철학자의 이름 한 자 없고, 남의 책에서 빌려온 구절 한 줄 없다.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순간의 감정들은 일반적인 작업노트보다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 그녀가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는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딱히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로 농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흐름이 그러하듯, 임현희의 작업은 작가 내부로 파고든다. 예를 들어 오래 살았던 곳에 대한 순간적 자각이 작업으로 진행된 경우, 그 자각이란 것이 어느 한 도시에 대한 보편적인 감상 혹은 향수라기 보다는 ‘나의 뿌리’에 대한 늦은 지각知覺 혹은 개인적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 개의 태양>이나 <천 개의 꽃> 시리즈 역시 개인적인 한 순간의 감상이 그대로 작업으로 진행된 경우다. 최근 대한민국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작가 개인의 경험과 감상, 그리고 성향이 있는 그대로 작업이 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현대미술=개념미술’ 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대한민국에 유행한 이 후 적지 않은 젊은 페인터painter 들이 제대로 녹지 않은 개념을 캔버스 위에 무책임하게 덮어 씌우기도 하는데 비해 최근 임현희의 작업에는 외부의 개념이 침투한 혹은 외부의 개념을 차용한 흔적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근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둥근 선이나 형태는 작업을 쉬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행한 붓질에서 비롯되고 굳어진 것으로, 검게 밑작업을 해놓은 캔버스를 눕혀놓고 둥글게 선을 그어 쌓아 올리며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의 방식은 추상표현주의의 방법론을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현희의 미덕과 극복해야 할 지점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 작업의 원동력을 찾아내고 본능적으로 발견한 방식을 굳혀 완성된 임현희의 작품은, 솔직하고 대담하다. 그러나 작가 자신에 대한 솔직함을 어떤 식으로 모두에게 보편적인 감성으로 여겨지게 할지는 이 후 임현희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순간의 감성을 말로 전달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오직 그림으로 풀어낼 수 있을 뿐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을 생각하면 그림이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약점을 간과할 수 없지만,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또한 작가의 길이고 업일 게다. 아울러 오래 전 회화의 전통과 흔적을 굳이 2014년에 다시 발견해야 하는 혹은 그것이 발견되는 이유를 찾아내고 이해시키는 것 역시 임현희의 역할이다. 또한 우연히 발견한 방법론에 근거한 최근의 작업에 ‘반드시 그 방법이어야 하는 당위’를 부여하는 것 역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스스로 단순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임현희가 풀어야 할 단순하지 않은 질문이다.

 

– 갤러리 버튼 함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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