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안의 고양이

조종성 개인전 <상자 안의 고양이>

2014. 6. 5 – 6. 26

 

 

닫힌 상자의 열린 이야기

 

슈뢰딩거의 고양이

숫자나 방정식은 접어두고 간단히 과학의 맛을 보자.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눈으로 보기엔 너무 작은 양자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물리학 이론이다. 우리의 상식이나 실 세계에서 보고 경험하여 알게 된 사실들이 작은 양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과학자들이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해석을 내놓게 된다. 이 가운데 코펜하겐 출신의 닐스 보어를 중심으로 한 과학자들이 내놓은 ‘코펜하겐 해석’에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등장한다. 슈뢰딩거라는 과학자는 철로 만든 상자 안에 일단의 장치에 의해 죽거나 살 가능성이 반반인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실험 이 후 이 고양이를 두고 전세계의 과학자와 학자 그룹은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게 되고, 그렇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파블로프의 개와 더불어 과학계 최고의 스타 동물이 된다. 그리고 몇 년 전 한국에서는 뚜껑을 열 때까지는 어떤 메뉴가 왔는지 모를 ‘슈뢰딩거의 치킨’을 만들어 배달하겠다는 게시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배달 받은 사람이 치킨의 상태를 ‘관측’하기 전까지 상자 안에는 양념과 후라이드가 중첩된 치킨이 들어가 있게 될 것이다.

 

있거나 없거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치킨보다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조종성에게 슈뢰딩거의 치킨은 그다지 매력 없는 메뉴겠지만, 어떤 상태의 혼재, 혹은 중첩이라는 상황 자체는 이번 전시에 그가 내놓은 작품들과 무척 닮았다. 조종성은 서양화의 원근법과 동양화의 삼원법을 넘나들며 작품 안에서 시점을 이동시켜 완성하는 형태의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알려진 작업들 외에 몇 가지의 작업 라인을 더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architecture agaINst space’ 시리즈다. 투명한 포장용기들 안에 종이나 석고로 모형 건축물을 만들어 세우는 이 작업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인 듯 보이는 실제 건축물들이 사실은 건축법이나 사회적 규제에 의해 결정된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정교하고 미려한 형태로 비꼰다. 조종성은 동양화 작업에서 집을 빼버리거나 다시 3차원의 세계로 끌고 나오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규제를 투명한 포장용기를 통해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시점과 차원, 법제와 규범이라는 키워드로 해석되어 온 그의 작업들이 일관적으로 ‘있고 없음, 보이고 보이지 않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단 한 번도 그의 작업에 ‘있고 없음과 보이고 보이지 않음’이 중첩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할 수 있는 한 그 상황의 혼재를 만들어 내고 관람객에게 관측의 의무를 지운다. 사실 이제까지 조종성의 전시에서 관측은 작가 본인의 몫이었다. 작가가 관측한 결과물들이 전시되었던 것. 당연히 그 결론도 작가의 몫이었다.

 

닫힌 상자. 열린 공간. 확장되는 가능성.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는 상자 속 양의 이야기가 나온다.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에게 소설 속 화자는 대충 상자 하나를 그려놓고 ‘그 안에 양이 있다’고 둘러댄다. 양을 위한 숨구멍도 몇 개 그려주고. 양은 있지도 않은 그림을 보고 왕자는 기뻐한다. 마치 상자 안에 진짜 양이 숨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린왕자의 상자 그림 안에 죽은 양과 산 양이 중첩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이야기의 얼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얼추 비슷하다. 양자물리학의 다양한 해석들이 결국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해석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는 만큼 왕자가 끝까지 관측할 수 없고, 관측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야기의 b-side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왕자가 상자 그림을 보고 기뻐했던 이유는 상자 그림이 가지고 있는 해석의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자 그림 안에는 양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왕자는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 가능성 자체에서 출발한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에는 ‘허무보다 큰 공간은 없다’라는 경구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는 해석과 인식의 비어있음’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닫힌 상자 안의 이야기는 어떤 해석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포개진 공간

앞서 말한 것처럼 조종성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다. 이번에는 사진이다. 그간 뜸하게 전시된 ‘architecture agaINst space’ 시리즈를 촬영하여 렌티큘러 작업으로 풀어냈다. 케이스의 투명한 뚜껑이 있고 없는 상태로 각각 촬영하여 이미지를 겹친 이 작업은 보는 각도에 따라 뚜껑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조종성은 그간 ‘투명하다’는 단어와 물성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투명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가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투명하다’는 말은 그저 단어와 개념에 대한 약속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규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기 위해 진행한 ‘architecture agaINst space’ 시리즈의 경우 눈에 확실히 보이는 ‘투명 케이스’ 때문에 건축물로 상징된 사회의 작동원리 혹은 그 구성원들을 둘러싸고 있는 규제를 표현하는데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뚜껑을 씌우거나 제거한 두 장의 사진을 한 공간에 중첩시킴으로써 보는 위치에 따라 관람객들이 ‘있고 없는 상태’를 확실히 관측할 수 있게 한다. 이게 이 전시의 제목이 ‘상자 안의 고양이’인 이유, 그리고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어린 왕자>의 양 그림, 소설 <화엄경>이 인용된 이유다. 결국 조종성은 렌티큘러 작업을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고, 관측의 방향과 그 결과에 대해 관람객들이 명확한 위치를 갖길 원했던 것. 뚜껑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사회의 규범은 우리를 옭아 매기도 하고, 동시에 보호하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이 중첩된 사회의 모습을 조종성은 한 장의 사진에 담아 보여준다. 무엇을 보고 어떤 상태를 선택할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지는 관람객의 몫이 된다. 이제 상자는 관람객들 앞에 놓여졌다.

 

그리고 architecture agaINst space

조종성이라는 작가를 잘 알려진 ‘시점 산수’만 두고 평가한다면 그의 절반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그의 개인적 성향을 간과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삶을 반영한다고 할 때 ‘architecture agaINst space’ 시리즈는 그의 사회적, 이성적 포지션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동양화 작가 조종성과 사회인 조종성의 접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대척점이기도 한 이 시리즈는 그래서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조명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 작품이라면 ‘architecture agaINst space’ 시리즈 역시 분명하게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 안에 들어가 있거나, 공간에 반하는 가상의 건축물을 통해 그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을 공유할 수 있다면, 작가에게 그것보다 큰 지지는 없을 것이다.

 

– 갤러리 버튼 함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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