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king the waves_파해(破海)

박지혜 개인전 <Breaking the waves_파해(破海)

2014. 11. 12 – 12. 7

 

 

헤어질 무렵에는 어떤 형태로든 그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만나는 횟수와 말이 적어지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 대신 어제 본 드라마와 연예인의 신변잡기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을 끌다 결국 그 사랑은 끝난다. 문제는 연애의 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때부터는 이 사랑을 지키려는 나에 대한 애정이 상대에 대한 애정을 뛰어 넘기도 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상황이다. 이 감정이 너무 소중해서 결국 상대의 감정을 통제하고 소유하고 싶어진다. 이제 이건 사랑도 연애도 아닌 괴물 같은 일방통행로가 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관계 맺기는 가족과 마을, 학교를 거쳐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 나아가 사회와 규범으로 꾸준히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사람은 더 공고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꿈꾸게 되며 그것이 비로소 내가 나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 믿게 된다. 나를 말하는 것은 내가 맺어온 관계고, 그 관계의 건실함이 나의 삶을 대변하게 된다. 그래서 관계를 맺는 행위는 신중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내보이는 것이고, 나아가 삶을 관통하는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지혜의 작업 <Breaking the waves>는 두 화면이 서로 마주보거나 붙어있지 않다. 직각으로 세워진 벽 위에 각각 투사되는 이미지는 얼핏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두 화면이 같은 내러티브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분할된 화면 속에서 두 인물은 서로의 행위에 일체 간섭하지 않으며, 딱히 상대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시계를 쥐고 절규하는 남자와 쓰러져 누워있는 여자는 그 혹은 그녀로 인해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상황에 집중할 뿐이다. 여자의 상황이 좀 더 절망적인 것 같지만, 역할을 바꾼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상대의 상황을 눈 여겨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끝, 관계의 종말이다.

 

사랑은 상대적이어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그 관계는 상호보완적인 형태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사랑은 분명히 파국에 이르게 되고, 그 파국의 형태는 잔혹동화의 그것을 닮게 된다. 박지혜는 전작들부터 꾸준히 사랑으로 포장되거나 오해된 감정이 만든 결과 혹은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하는 사건들을 동화적이며 중의적인 영상을 통해 재현해왔는데, 그런 일련의 작업들은 신형철의 말을 빌어 읽어낼 수 있다. ‘카프카적인’ 정도로 해석되는 ‘카프카에스크kafkaesk’는 대체로 부조리하고 위협적인 상태 앞에 놓인 인간의 감정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신형철은 그의 책 <느낌의 공동체>를 통해 ‘착오가 낳은 결과가 원인이 되어 그 착오를 소급적으로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이야기’로 풀어 해석한다. 그러니까 박지혜는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그것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려 이젠 마치 그것이 사랑인 양 행세하는 상황 또는 그 거짓 사랑이 만든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랑’은 ‘관계’란 단어로 치환돼도 상관없다. 되려 그렇게 치환하는 편이 옳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공고히 하는 행위는, (외면하고 싶지만) 매우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상대에 작용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맺은 모든 관계는 폭력적으로 작용하거나 강제성과 일방적 성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박지혜는 사랑이라는 통속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통해 그 관계의 이면을 들여다 보게 한다.

 

아울러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의외로 액자 속의 인형과 그 배치가 될 수도 있다. 분할된 화면 속 두 남녀의 맞은 편에는 3초에 한 번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벽에 기대있는 긴 머리의 인형이 있다. 모터가 돌아가며 눈꺼풀을 움직이는 까닭에 인형은 3초에 한 번씩 ‘찰칵’하는 소리를 내게 되는데, 이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3초에 한 번씩 촬영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작가의 머리카락을 인형에 씌운 이 작품은 박지혜의 대리인이자 분신으로 부조리한 관계가 낳은 부조리한 결과물이 마치 진짜인 양 행세하는 과정과 결과를 지켜본다. 알려진 것처럼 박지혜는 직간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바, 전시장 안에서는 작가의 분신이 작가의 경험을 목격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현재의 작가가 과거의 작가를 지켜보고 기록하는 동안 전시장의 시간은 두 줄로 평행하게 흐르게 된다. 다른 차원의 세계가 구현되는 것이다. 단순히 목격자와 기록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게 만드는 작품의 배치는 단순한 작품의 디스플레이를 넘어 그 의도와 실천 자체로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전시는 그렇게 개별 작품들의 내러티브가 교류하면서 하나의 큰 이야기로 어우러진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상대와 나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행위다. 때문에 일정한 부분을 내어주고 받는 일이 반복되어야만 한다. 박지혜의 전시는 본인의 과거와 현재를 작품과 작품의 배치를 통해 교통시키는 통로를 만들고, 그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관계 맺음에 성공하고 있다.

 

박지혜의 작업은 스웨터에서 삐져나온 실오라기 같아서, 작가의 이야기를 잡고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아주 인간적이고 당연한 그러나 너무 내밀해서 공유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경험과 감정을 작가와 관람객이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거대한 철학적 담론과 호기심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를 통해 모두가 목격했을 법한 사건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은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인다. 4분 30여 초 동안 영상 앞에 당신이 서 있는 동안 ‘나는 내 어머니와의 관계 맺음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이미 맺어진 상태로 그녀를 처음 만났고, 사랑이라 믿고 있던 그것은 사실 치졸하고 옹졸한 소유욕과 정복욕이 만든 거짓 사랑이었으며, 어느 때고 내가 맺은 관계가 가진 힘은 내게도 일방적인 형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시장에 흐르는 그녀의 시간을 타고 당신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박지혜는 3초에 한 번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서있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 갤러리 버튼 함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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