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흔들림_Trivial Wavering

최희승 개인전 <사소한 흔들림>

2015. 2. 6. – 2015. 2. 25. 

 

 

<작가노트>

모든 사물, 모든 사람은 관계함의 연속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떠한 기억, 냄새, 주변의 공기, 이불이 스치는 소리, 베개의 촉감 등과 관계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 관계하고 있음’을 매 순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는 절묘하게 짜여 있어, 어떤 하나의 물성 혹은 시간성이 틀어진다면 그 주변의 공기가 바뀜과 동시에 모든 것의 균형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은 공기는 관계가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며 이 사이는 우리를 부양하고 있다. 결국 개인이 혹은 어떤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고, 공간이 각각의 사물과 타자에게 사이(관계함)을 다른 형식으로 낳아주는 것이다. 작업 속에서 이러한 교환관계를 계단 혹은 사다리라는 이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이용해 표현되어 지기도 하며 잠이 드는 순간의 그 모호한 경계를 빌려 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시간이라는 요소와 함께 찾기도 한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의 기억과 경험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들은 일방적으로 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생각한다. 말인 즉 과거의 어떠한 사건 또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은 후에 기억으로 형성되며 시간이 지남과 함께 이 기억에 대한 기억으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형이 반복되며 새로운 형태를 형성하게 되고 동시에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과거의 어떠한 사건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그 사건들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Wrapping shoes

자살하기 전 사람들은 마치 신발이 그들이 살아온 세계의 기억을 담고 있다는 듯 하나의 의식처럼 신발을 놓고 떠나간다. 이렇듯 신발은 기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작용한다. 신발을 하나하나 포장함은 기억에 대한 기억임과 동시에 기억을 망각함을 나타낸다. 결국 살아감은 추억도 기억도 희뿌옇게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망각 속에 보존된다.

 

Covered

어렸을 때 어머니는 취미로 그림을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세평 정도 크기의 작업실을 가지고 계셨고 어린 나이 돌봐줄 사람이 없었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내가 앞치마를 입고 붓으로 캔버스의 여기저기를 칠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어머니가 그린 그림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우연히 어머니가 남기신 재료와 그 캔버스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이것들은 나의 기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이미지들을 반복하여 재구성함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어머니 그림에 덧칠을 하여 그 곳에 놓아 두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께서 그리신 그림과 전혀 다를 것 없이 똑같이 새로운 이미지들로 나에게 들어왔을 것이다. 어찌 보면 어린 나이에 접한 그 그림들의 첫 이미지는 죽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을 덮듯이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캔버스는 그 이미지들의 변형되고 있는 죽음의 현장이고 또한 영정사진이다. 또한 이것들은 내가 만들어놓은 이미지들 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 될 것이다

최희승

<전시서문>

우리가 그랬듯 아이들은 아직 그림 속 하늘을 ‘하늘색’ 크레파스로 칠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하늘은 하늘색이 아니고, 연한 파랑이라는 대표색 이름이 있는데도 굳이 하늘색이라고 부른다. 하늘이 하늘색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지구의 대기와 대기중의 먼지가 만든 굴절과 난반사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안다. 우주를 구성하는 총 물질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어떤 종류의 전자기파로도 관측되지 않지만 중력을 통해서는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 보이지 않았고 관측되지 않았기에 ‘없다’라고 단정할 수 있었으나 다른 방식으로 존재가 증명되고, 그것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알려진 후 비로소 우주의 시작과 끝, 팽창과 소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내 주변 모든 것들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가득 차 있다. 그건 아주 작은 박테리아나 먼지일 수도 있고, 대기를 구성하는 물질일 수도 있다. 지구와 달, 멀게는 태양의 중력도 그 사이에 존재하며 작용하고 있을 것이며 전파와 음파도 에너지의 형태로 우리를 둘러 싸고 있을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안온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무엇은 비단 물질적이거나 물리학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존재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오래 전 흐른 시간과 지구에 존재했던 수많은 존재들의 기억, 그리고 사방으로 뒤얽힌 감정과 관계들 또한 나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물 속에 사는 물고기나 진배 없는 모양새로 사는 셈이다. 물 속을 유영하며 사는 물고기처럼, 암흑물질 속에 떠있는 지구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 사이에 부유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체감하는 순간, 우리는 막 잠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생경함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꿈과 현실의 어지러운 경계에서 지금 내 손 끝에 닿는 낯선 이불의 촉감이, 뭔가 부옇게 흐려져서 낯설게 보이는 공간이, 실은 오랫동안 덥고 잠들던 바로 그 이불이며 그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온 익숙한 내 방이라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최희승의 작업은 일렁거린다. 형체는 알아볼 수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지만 또렷한 선도 명징한 선과 색도 사라졌다. 무채색의 이미지들이 향하는 지점도 모호하다. 틈으로 새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그것이 문임을 알게 하고, 어두운 복도의 계단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면 무채색의 단색화처럼 재현된 작품 속 공간은 지속된 불면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듯 모호하다. 형태도 지향점도 온전히 내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은 묘하게 흔들린다. 어릴 적 본 만화에서 4차원 세계로 빠지는 주인공의 형체가 물결처럼 흔들리는 장면이 자꾸만 생각난다. 작품이 물속에서 하늘을 보는 것처럼, 볕이 좋은 봄날 먼 데서 아지랑이가 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최희승이 만든 공간에서 또렷한 경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다 일어나 아직 꿈이 현실을 지배하는 순간을 닮았다. 균형을 잃고 뒤틀려 모호해진 순간의 포착이다.

 

다만 최희승에게 중요한 것은 모호함 자체가 아니다. 존재와 존재, 나아가 시점과 시점 사이에 모호함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이 양쪽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사유하는 과정 중에 이 모호함이 재현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최희승의 작품에 재현된 이 모호한 공간은 작품 속 계단의 시작과 끝,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암흑물질과 은하의 중력이 상호 작용하여 우주를 진화시키는 것처럼 존재와 존재, 시점과 시점 사이를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가득 채우고 변형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최희승의 작업에 명징한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은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계단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문 뒤에 있는 공간은 대체 어떤 곳일지, 다른 이미지가 그려진 실크가 겹쳐져 만들어진 이미지는 대체 무엇인지, 작품 속에는 모호한 형태로만 남은 해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꿈과 현실,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결국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오랫동안 그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수많은 관계가 얽혀 만들어낸 것이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으므로 훗날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게 될 지 알 수 없음을 은유하고 있는 것. 마치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서로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현실의 일상이 꿈의 재료가 된다면, 그래서 꿈과 현실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면, 꿈은 흔히 생각하듯 해몽을 통한 예지의 역할 뿐 아니라 삶을 되새겨 기억하고 반추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잠에서 떨 깨,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은 단순히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침투한 꿈이 익숙한 공간을 일순간 생경하게 만든 힘을 느꼈기 때문이고, 어쩌면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관계 맺고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세계의 관계가 방 안 공기를 뒤흔들고 비틀었을 때, 방 안 풍경은 마치 최희승의 작품 속 이미지처럼 모호하고 희미한 형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삶을 가득 채운 기억들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명확하게 하는 관계 맺음이 역설적으로 작용하여 나를 지금과 다른 존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녀의 작업 안에 있다. 역시 최희승의 작업은 일렁거린다.

 

– 갤러리 버튼 함성언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