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展 전시서문

강준영 / 김준명 2인전 <앞=뒤> 전시서문

2015. 피아룩스, 서울

 

다섯 살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외갓집 사랑채 생활을 접고 언덕 위에 집을 지어 내 집 장만에 성공하셨다. 그 때부터 시작된 ‘우리 집’ 생활은 서울 유학생이 된 이 후 끝이 났다. 스무 살, 어른이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집’이 없다. 집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고달프다. 거의 매 년 오르기만 하는 보증금과 월세, 덕분에 통 늘어날 줄 모르는 은행 잔고도 걱정이고, 온갖 집안 살림부터 삼시 세끼 끼니 걱정도 온전히 내 몫이다. 어쩌다 아프기라도 하면 앓는 와중에 끼니를 챙기고 살림까지 해야 하니 서럽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럴 땐 정말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말을 하고 보니 집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건축물, 부동산, 재산가치 등 물질적 의미의 집과 가족, 공동체, 연대와 같은 정서적 의미의 집. House와 Home을 떠올려도 되겠다. 혼자 생활하는 나는 지금 house도 home도 없는 셈이다. 게다가 어느 순간인가 내 돈을 주고 내가 살 집을 구입하고 싶은 욕망은 커졌지만, 가족을 만들고 가정을 꾸려 ‘함께’ 살 궁리는 덜하게 됐다. 생활 공간을 공유하고 부딪히는 일이 되려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에 큰 집에서 잠깐 부모님을 뵙고 서둘러 ‘내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문득 마을 공터에 검정색 부리사를 주차시키고 언덕을 걸어 올라오던 내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집은 그에게 안온한 곳이었을까?

 

두 의미의 집은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필수적이며 기초부터 쌓아 올려야 완성된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물질적 의미로서의 집을 짓기 위한 기초적인 요소들 중 몇 가지만 빠져도 그 집은 틀림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정서적 의미로서의 집도 마찬가지다. 가족 구성원이 조합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간에 굳건하고 친밀한 연대는 필수적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어떤 형태를 완성시킨다는 점에서 집은 수많은 경험들이 축적되고 작용하여 한 인간의 삶이 구체화되는 사람의 인생을 닮기도 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그렇게 ‘내 집’을 원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집은 그저 모든 가족공동체가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 있음을, 그래서 지금 무엇인가를 이뤄나가고 있다는 증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다시 말해 집이야말로 삶의 모든 것들 콘크리트 붓듯 쌓아 부어 올린 나와 내 인생의 결정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자존감에 슬슬 실금이 가는 중이다. 열심히 살았고, 살고 있음에도 나는 아직 ‘내 집’을 장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집’을 장만할 가능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도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당장이라도 건물 한 채 올려서 가족들 우르르 몰고 들어가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나라에 몇 명이나 될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삶이 성공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내 집’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강준영과 김준명의 작업은 그런 나를 묘하게 흔든다. 지극히 사적인 고민의 지점들이 그들의 작품 곳곳에 닿아있다. 강준영의 작업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그려온 수천 장의 집 드로잉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굳이 그의 개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드로잉 곳곳에 적힌 글귀들로 그가 그저 흔한 박공 지붕의 건축물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어쩌면 그가 그려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껍데기 안에 숨은 달팽이의 본체일지 모른다. 아이들이 그린 집 그림과 엇비슷한 그의 드로잉은, 그래서 아이들이 집을 그리며 정말 그리고 싶었던 것을 그리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건축물로서의 집이 그 안에 담고 있는 것. 사랑과 흠모,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이해와 신뢰. 작가가 만들고 싶은 집은 그런 것이었으리라. 작품 안에 종종 등장하는 폴 틸리히_Paul Tillich의 ‘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라는 문장은 작품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의 거의 모든 것이다. 그가 살고 싶은 집이란, 가족 구성원들이 만든 유대감으로 지어진 집이리라. 터지듯 사용된 색의 풍부함과 그로 인해 작품에 부여된 충만함은 어쩌면 그 가족의 유대감의 은유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집은 home과 family의 동의어처럼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인, 안으로부터의 집이다.

 

반면 김준명의 작품은 좀 더 ‘집’이라는 단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블록과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삶의 공간. 내 몸 뉘일 곳. 사람들이 살고 있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대상으로서의 집이다. 작품 이미지도 그렇게 쌓아 올렸다. 어쩌면 강준영이 만든 집은 김준명의 작업 속 집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만든 여러 의미의 집들이 쌓여 다시 작품 속 큰 집의 벽체가 된다. 누군가가 이미 살고 있는 집이거나 살고 싶은 집들이 쌓여있는 모습은 집에 대한 간절한 소유 의지와 욕망이 쌓여 만든 사회를 보는 듯 하다. 한발 더 나가 아예 ‘집’이라는 글씨를 파 낸 도장을 찍어 완성시킨 드로잉은 그 의지와 욕망의 정점을 보는 듯 하다. 사실 집을 갖길 원하는 욕망은 매우 순수하며 당연한 것일 텐데, 그것이 모여 만드는 장면은 사회에서도 작품 속에서도 일견 섬뜩해 보이기도 한다. 김준명의 집은 모든 구성원의 욕망과 간절함의 끝이고, 그래서 각기 다른 욕망이 쌓여 만든 거대한 집이며, 바로 지금 당신의 거울이거나 속사정이다. 그의 집은 모두의 집이다.

 

그렇게 둘의 작업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비로서 ‘집’이란 것의 정의, ‘집’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푼다. 강준영의 작업이 쌓이면 김준명의 작업이 되고, 김준명의 작업을 해체하면 강준영의 작업을 볼 수 있다. 집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정의가 모여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집’에 대한 생각을 들쑤신다. 내 삶의 모습을 억지로 다시 보게 한다. 그건 지금 남의 집에 혼자 살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집과 담을 넘어 뒷산으로 뛰어올라가던 여섯 살의 내가 생각하는 집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두 작가가 집 얘기를 하니, 그걸 보고 있던 나는 오랜만에 내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다.

 

– 갤러리 버튼 함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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