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und Zero

서원영, 이수정 2인전 <Ground Zero>

2015. 3. 18. – 3. 28

 

 

변화에 대하여_이수정

강 정 호 미술비평

I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할 때, 보는 이의 감탄은 대부분 겉모습에 나타나는 극적인 단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보고자 하는 이의 감동은 그러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비밀스레 유지되는 애벌레와 나비의 동질감에 자리한다. 나비는 애벌레의 속성을 완전히 떨쳐버렸기 때문에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간직함으로써 비로소 나비가 된다. 또한 애벌레는 나비의 속성을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애벌레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충실히 갖추었기 때문에 애벌레로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나비가 애벌레보다 성숙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애벌레가 나비보다 미숙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일관성을 지켜왔던 한 작가의 작품이 어느 순간 알아볼 수 없게 변했을 때, 우리는 손쉬운 얘깃거리를 안겨주는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변화 속에 더욱 견실해지는 일관성을 놓치곤 한다. 스무 해를 지속한 나무 작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목조 작가’로서 각인된 이수정의 작품 세계에 찾아온 변화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재료와 형식에 있어 파격을 보인다. 오브제에 스팽글을 붙이는 일, 뜨개질을 해서 형태를 짓는 일, 잡동사니를 한데 겹치는 일 등 이번 전시를 구성한 이수정의 손길은 이제까지 지속된 나무 깎는 일과는 모든 면에서 이질적이다. 관객 가운데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수정이 목조라는 작업 방식을 고집스레 지속했던 작가였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수정의 목조 작품 곁에 머물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번 전시에서 오랜 여행 끝에 종착지에 닿은 것 같은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낄 것 같다.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을 맞이하는 낯선 풍경이 힘들었던 여행의 귀결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반짝이는 스팽글의 잔물결에서 끌질된 나무의 투박한 표면을 보게 되고, 홀가분하게 늘어진 직물의 더미에서 굳건한 목재의 중량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재료와 생경한 형식으로 나타난 작품에서 이수정의 오랜 관객이 재회하는 모습이 예전 작품의 잔상(殘像)만은 아니다. 분방하게 펼쳐져 있는 이번 전시의 풍경에서 그 관객이 궁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이수정의 나무 작업이 지향하고 있었지만 미처 진입하지는 못했던 어떤 세계이다.

II

이수정이라는 작가를 오늘날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 짓는 가장 큰 특성은 아마도 삶의 통합성에 대한 그의 진지한 신념일 것이다. 이수정은 파편처럼 흩어진 삶이 보편화된 시대에 세계를 아우르는 이치에 대한 믿음을 표명하고, 자아와 타자의 구분 없음, 몸과 마음의 하나 됨을 얘기한다.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수정의 세계관이 깊은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념을 한갓 구호로서 소진시키지 않고 고행에 가까운 작품 활동으로 그것을 지켜 나갔기 때문이다. 목조라는 작품의 형식은 그의 세계관을 지탱하는 최적의 매체로서 선택되었는데, 지난 이 십 년 동안 그것은 맞춘 옷처럼 자연스럽게 작품 활동에 스며들어 그의 신념이 숨을 쉴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이수정이 목조 작업을 통해 견지하고자 했던 신념은 철저한 자기완결성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었고 위태로운 고립을 감수해야 되는 것이었다. 이수정이 깎은 나무 형상은 대부분 스스로 생장하고 존속하는 자연물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응결되어 있는 씨앗, 스스로 피어나고 돋아나는 꽃과 새싹 등을 표현한 그 형상들은 종종 공허 속에 홀로 있는 여체(女體)와 닮은꼴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역설적으로 배어나는 고독의 정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수정이 추구하는 삶의 통합성이 혹시 작가의 내면세계에 유폐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 이수정의 나무 형상에서 나타나는 통일성과 견고함, 균형과 조화는 그가 지탱하는 세계의 내부에서만 실현 가능한 미덕처럼 느껴졌고, 그러한 세계의 바깥에 위치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떠받히고 있는 작가의 고독한 모습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 결과 이수정의 작품에 공감을 표했던 관객들은 그의 신념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실현되기 힘든 신념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에 이끌리게 되었고, 그러한 노력에 의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가의 고독을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III

애벌레로 계속 지속되었던 나비가 문득 자신이 애벌레임을 어색하게 여기는 순간 고치를 짓고 번데기가 되듯이, 이수정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자기완결적인 나무 형상의 세계는 언제부터인가 맞지 않는 옷이 되었고 그는 ‘목조작가’이기를 멈춘다. 번데기처럼 닫혀져 있었던 유예와 모색의 시간은 어느 날 문득 이수정이 목재의 표면에 반짝이는 스팽글을 붙이는 순간 바깥으로 열리게 되었다. 천진난만하게 빛을 발하는 모조보석을 목재의 표면에 늘어놓으며 이수정은 숙명과 같았던 자기완결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동시에 스무 해를 지속하였던 목조 작업에서도 비로소 놓여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응집된 무게감, 중력을 거스르는 견고한 구조, 덩어리의 구심력을 나타내는 거친 표면 등 그의 작품에 항시 동반되었던 물질적인 속성들도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오로지 바깥으로만 발산되는 가벼운 반짝임, 분산된 부피감, 중력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구조, 덩어리의 실재를 교란시키는 화려한 색채 등 과거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는 형태들이 등장했다. 이수정은 헐겁고 연약해서 스스로 아무런 세계도 지탱하지 못할 것 같은 이 형태들을 가지고 다시 작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팽글을 붙이고 뜨개질을 하는 그의 손길에는 나무를 깎을 때와 같은 사명감이 빠져있다. 그 대신 소일하는 사람의 흥얼거림과 같은 넉넉한 자족감이 그의 작업에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삶의 통합성과 세계의 이치에 대한 이수정의 신념은 철회된 것일까? 그는 더 이상 고독의 성체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진정성의 화신(化身)이 아닌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우리는 ‘예’와 ‘아니요’를 동시에 말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이수정은 바깥 세계의 우연성과 일시성 속에 종이배를 띄우듯 자신의 신념을 맡기고 있다. 그러나 이수정의 종이배가 그저 무책임하게 방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분방하고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번 전시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요소는 자폐된 내면을 형성하지 않겠다는 이수정의 숨은 의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좌표로 삼아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과거의 나무 형상은 자석의 반대 극처럼 이번 전시에 나타난 다양한 작품들에게 미묘한 결을 부여한다. 부표처럼 떠다니는 형태들은 구조를 이루며 세계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며 세계 속에 스며든다. 대상을 환경으로 용해시키려는 노력 속에 이수정이 추구했던 삶의 통합성은 세계에 상주(常住)하고자 하는 미련을 버리고 스치듯이 지나가기만 한다.

그러나 한없이 헐겁고 연약해 보이는 이러한 스침 속에 이수정의 신념은 스스로를 자폐시키지 않고 세계와 어울릴 수 있는 형식을 얻는다. 이제 삶의 통합성은 고독하게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속에 포착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타난 이수정의 작품은 삶의 통합성이 실현되는 순간의 우연성과 일시성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를 세계 속에 던진다. 그와 함께 이수정이 나무 작업을 할 때부터 두드려 왔지만 여태껏 열리지 않았던 하나의 문이 열리게 된다.

 

닮지 않은 반짝임_서원영

 

강 정 호 미술비평

I

고무 찰흙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종종 어른들이 알아볼 수 없는 형태를 빚어 놓고, ‘야옹이 만들었어요,’ ‘멍멍이 만들었어요,’ ‘꼬꼬 만들었어요.’ 라며 자신의 솜씨를 자랑한다. 그럴 때 작은 손이 내밀고 있는 정체 모를 찰흙덩이와 고양이, 개, 닭이라는 ‘정체가 분명한’ 이름의 간극 앞에 어른들은 난감해진다. 그러나 칭찬을 재촉하는 간절한 눈빛에 떠밀려 어른들은 ‘똑같이 잘 만들었네!’ 라고 탄성을 지르며 아이의 기대에 호응하게 된다.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은 안도와 확신으로 빛나고, 고사리 손이 만든 고양이, 개, 닭은 더 이상 손 댈 필요가 없는 작품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아이가 누리는 의기양양한 기쁨과는 상관없이, 그 찰흙덩이는 어른들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렇게나 빚어 놓은 찰흙덩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에 고양이, 개, 닭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닮음의 표지는 그것을 만든 아이만이 알아볼 수 있는 내밀한 기호가 되어 정체 모를 형태 속에 감추어진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찾아내는 닮음의 기호는 그 순진무구한 자의성 때문에 기호로서 소통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진지하고도 시적인 대답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의『어린 왕자』에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진부할 정도로 많이 읽히면서도 내재된 고독의 핵(核)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그 텍스트는 사실 자의적인 닮음의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에서 시작하여 ‘해맑게 웃는 별’로 마무리 되는『어린 왕자』의 이야기는 자아만이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밀한 기호를 어린 왕자라는 타자가 예사롭게 해독하면서 이루어진다. 즉, 아무렇게나 빚은 것 같은 찰흙덩이에서 고양이, 개, 닭의 내밀한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이가 그걸 빚은 당사자 말고도 또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린 왕자는 자아 속에 고립된 내밀한 닮음의 기호를 일깨울 수 있는 타자로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희망으로 조탁된 것만 같은 그 이야기가 맺어질 때 내면의 소통을 통해 진실의 공동체를 가능케 했던 타자인 어린왕자는 이 세계에서 흔적 없이 소거된다. 결국 소통할 상대를 읽은 자아는 다시 자신의 고립된 성체 속으로 돌아가고 모자는 모자로, 별은 별로, 찰흙덩이는 찰흙덩이로 남는다.

II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을 보이는 서원영의 작품에는 닮음의 기호와 관련된 두 가지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 중 하나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 아이는 만들기 놀이를 하다가 문득 비밀스러운 닮음의 기호를 찾아내고 설레는 맘으로 자신의 발견을 세상에 전하려 한다. 나머지 하나는 어른의 시선으로, 그 사람은 내밀한 닮음의 기호로 소통을 하는 것이 오히려 위태로운 고립 속에 아이를 가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근심 많은 보호자처럼 아이 곁에 머물고 있다. 어린아이는 작업장에 가져다 놓은 흙과 돌과 옥(玉)으로 맘속에 떠오르는 상을 빚고 깎는다. 그리하여 딱히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모종의 ‘닮음’을 품고 있는 세 가지 형태를 만든다. 그 아이는 자신이 발견한 닮음의 자의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건 A야!’, ‘이건 B야!‘, ’이건 C야!‘ 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작업장에 머물고 있는 어른은 그것이 현실에서 A, B, C 로 수용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아이가 ‘이건 A, B, C 가 될 수 없음’ 이라는 현실과 직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형태에 아이가 충분히 흥겨워할 만한 비유와 상징을 담은 그림으로 가필(加筆)을 한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이걸 D라고 하는 건 어때?’, ‘이걸 E라고 하는 건 어때?’, ‘이걸 F라고 하는 건 어때?’ 라고 제안한다. 아이는 직접적인 지시의 언어인 A, B, C가 간접적인 비유와 상징의 언어인 D, E, F 로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어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아이가 만든 형태는 어른에 의해 ‘약간’ 탈바꿈되어 A, B, C 를 외치는 설렘과 행복을 져버리지 않고도 무사히 존립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 나타난 서원영의 작품은 아무렇게나 빚은 찰흙덩이와 다름없는 천진난만한 자의성으로 반짝인다. 그것은 화분을 만든 것 같지만 화분이라 규정할 수 없고, 바다 위를 비행하는 날치를 재현한 것 같지만 날치라 단정할 수 없는 미정(未定)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의 창작자인 아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화분과 날치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또 다른 창작자인 어른은 아이를 좇아 그것을 ‘화분 하나와 날치 두 마리’라고 고집하지 않고 ‘푸른 수염’, ‘보름달의 괴물’, ‘야간 비행’ 이라는 동화 같은 제목으로 온유하게 갈무리한다. 제목이 가필한 그림과 관계를 맺으며 드러내는 비유와 상징은 아이가 만든 형태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여, 아이가 만든 형태를 해설하기도 하고 그것 자체의 이야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반짝이고 있는 자의성을 참지 못하는 누군가가 ‘이게 무슨 애들 장난 같은 작품이냐?’ 라고 아이를 힐난하면, 어른은 앞으로 나서서 나무랄 데 없는 명료함과 충실성으로 자신이 작품에 덧붙인 비유와 상징을 논증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려 깊은 어른의 책략 때문에 어린아이는 시무룩해지지 않고 놀이를 이어갈 수 있고, 서원영의 작업실은 빛을 잃지 않게 된다.

III

아마도 서원영의 예전 작품을 깊이 경험한 관객들은 세 점의 소품으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에서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그의 전작에서는 제 마음대로 형태를 찾아내는 어린아이를 위한 작업장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기호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결정되지 형태를 있는 그래도 노출시키는 한가로움도, 제목에 나타난 비유와 상징이 형태를 직접적으로 설명치 않고 에둘러 가는 느슨함도 서원영의 전작에서는 낯설었던 광경이다. 그동안 서원영의 작품은 논증적인 명료함과 주석자와 같은 충실성에 팽팽하게 옥죄어 있었다. 그 속에는 제 그림의 참 뜻을 어른들에게 전하는 데 실패한『어린 왕자』의 화자(話者)가 화가 되기를 포기하며 제 인생에 행했던 사보타주 같은 생채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현실 세계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명료함과 충실성이라기보다는, 현실 세계에 자신을 방기하기 위해 선택된 명료함과 충실성에 가까웠다. 그런 까닭인지 그의 작품은 어떤 주제와 형식을 취하든 간에 보는 이를 초조하게 만드는 자학적인 분위기를 어딘지 모르게 자아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러한 명료성과 충실성이 동반하는 음울함은 천진난만하게 빛나는 자의성 속에 치유를 받는다. 이제 서원영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정조는 자학적인 사보타주가 아니라 내밀한 닮음 속에 외롭게 머무는 타자 혹은 자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마치『어린 왕자』의 화자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소한 사건과 사물에 위태롭게 골몰하고 있는 어린 왕자를 안타깝고도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보듯이, 서원영은 아직 무엇인가를 의미하지 못하는 형태를 만들어 놓고 ‘이건 화분이에요!’, ‘이건 날치에요!’ 라고 해맑게 외치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에게 ‘정말 똑같이 잘 만들었네, 수고했어.’ 라고 칭찬할 수 있는 진심을 이번 전시를 통해 너그럽게 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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