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지_The Moment that I feel that I know

노세환 개인전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지_The Moment that I feel that I know>

2015. 10. 7. – 10. 28.

남들 하는 일은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고, 세상에 나보다 특별하고 특이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망아지 같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남의 돈 받아 산다는 건 그 때라고 딱히 쉽지 않았고, 일의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고 예상할 수 있는 일은 일 같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좋은 시절이기도 했고.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 홍대 앞, 하필이면 어느 갤러리 지하였다. 거기에 노세환이 있었다.

그는 자기 신발 사진을 찍고 오려낸 작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게 정말 노세환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심심풀이 같은 것이었고 진짜 작업은 장흥에 가서야 볼 수 있었다. 1초의 노출값을 두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역이나 신호등에서 찍은 사진들은 ‘세련’이란 말이 참 어울리는 작업이었다. 설치와 미디어의 시대였고, 대안과 비영리의 시기였다. 그의 ‘세련됨’이 모두에게 환영 받을 리 만무했고, 그 즈음의 그는 대형 갤러리에서 꽤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젊은 작가였음에도 환영하지 않는 이들을 설득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간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큐레이터 생활을 시작할 무렵, 노세환은 정말 대나무처럼 자라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이 표현을 참 싫어하겠지만, 찾는 사람과 공간이 많은 작가들을 바라보는 당시 마음은 딱 그런 것이었다. 나는 크지 않은 공간에 갇혀 버팀과 견딤으로 완성될 리 만무한 큐레이터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었다. 딱히 앞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다시 도망칠 용기도 없었던 시절, 고맙게도 노세환은 그래도 옆에 붙어 있어줬다. 가끔씩 술이나 밥을 사주며 그는 “일단 자기 앞가림을 잘 해야 좋은 큐레이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 땐 그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말하는 그가 얄밉기도 했었다. 선의를 선의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에게 기대할 게 무어냐,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물론 지금은 그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생각해보면 9년 세월 동안 그를 자주 본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저 오래 두고 본 사람, 쯤이 되겠다. 서로에 대해 듣기 좋고, 싫은 얘기들을 건너건너 들어 왔을 텐데 딱히 그도, 나도 ‘그러므로 인연을 접자’거나 ‘따져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은 듯 하다. 가끔 술이 취하면 호형하며 반쯤 말을 놓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선생님’으로 돌아간다. 어느 위치에서든 할 것들은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엇비슷하다. 그래도 그는 나의 거의 모든 상황들을 알고 있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년에 두어 번 만나 통음하며 나누는 얘기들이 생각보다 깊은 탓이다.

전시장에 작품을 옮겨 놓으며 농담처럼 ‘이게 무슨 회고전인가’라고 말했었다. 그는 전시가 노세환을 알기 위한, 혹은 그의 작업이 흘러간 방향을 연구소처럼 꾸며 보여주고 싶어했다. 작품을 걸기 시작하자 갤러리는 곧 작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수사가 아니라 정말 ‘가득 찼다’. 벽에는 18조각의 신작이 걸렸고, 안쪽 공간으로는 그 신작을 만들기 위해 그가 고민했거나 실험한 내용들과 장치가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와 바닥에까지 작품을 내려놓은 그는 빈 공간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듯 했다. ‘어딘가 편집증적이면서 딱히 어수선하진 않은 선생님 같은 디스플레이가 나왔네요.’ 내가 말하자, 그가 부정했다. 아니, 부정하고 싶어했다. 그는 어수선하게 널부러진 전시를 원했던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그는 그랬다. 어수선하거나, 조금 널부러져 편안한 인간이 되고 싶어했고 넉넉하고 적당히 틈이 있는 사람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고슴도치처럼 촉이 서있는 사람이었고, 언제나 호불호가 명확했으며, 아주 작은 것에서 멋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흔한 말로 ‘디테일이 살아있는 뾰족한 사람’이었던 게다.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관계와 또 그것을 닮은 전시다. 농담으로라도 ‘회고전’ 운운할 수 있을 만큼 그의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전시고, 그런 그와 그의 10년을 지켜본 사람이 이제야 하게 된 전시다. 더 큰 공간과 더 큰 기회를 얻어 전시하는 작가에게 쉽게 함께 전시를 하자, 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우리는 깊지도 얕지도 않아 보이는 관계를 조금 더 유지해야 했으며, 조심조심 전시를 이야기하고 작업실에 놀러 갔던 날에는 예의 일 년에 몇 번 있는 통음을 대낮부터 해야 했다.

얕으면 얕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물은 누군가에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데 이 묘한 10년의 우정(감히 우정이라 부르고 싶다)이, 그리고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이 전시가 어떤 물길을 찾아 흘러가게 될 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전시는 갤러리와 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우리는 분명 ‘일 하는 상대’로서의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건 어떤 형태로든 실망이나 분노로 이어지기 십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노련한 가정주부처럼 전시를 요리할 것이고, 무딘 칼처럼 움직이는데 익숙하고 편한 공간과 나는 그가 원하는 요리를 만드는데 순간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뷰를 하러 간 자리에서 그는 우리의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관계를 닮은 전시를 내밀었다. 그건 버튼의 전시가 늘 그러했듯 내가 그와 그의 작품을 ‘안다고 느끼는 순간_The moment that I feel that I know’을 철저히 배신하는 기획이었다. 반듯한 그의 작업이 벽에 여남은 개 걸려있고, 얌전히 자리 보전하고 앉아 작품을 팔거나 설명하는 그 뻔하고 일반적인 전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어딘가 편집증적이지만 그렇다고 어수선하지는 않은’ 전시를 하게 되었고, 가만 돌아보니 그건 작가를, 그리고 나와 그의 관계를 쏙 빼 닮았다. 적어도 전시가 열리는 지점에선 깊이가 있고 없고, 담론이 어느 지점에서 생기는지 따위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고, 내가 그 얘기를 받아 멋대로 말할 수 있는 전시가 되는 것. 깊지도 얕지도 않은 관계를 닮았다고 킥킥대며 대화할 수 있는 것. 일년에 몇 번 대낮부터 마시며 수다 떠는 그런 날이, 전시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 전시는 충분히 괜찮다.

대화가 좀 겉도는 것 같나? 그건 우리가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갤러리버튼 함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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