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재생전람회

최성균 Solo Show

2018. 3. 8. Thu. – 3. 21. Wed. 

 

제 값을 하고, 제 일을 하던 때가 있었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어느 가족의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었고, 희한한 웃음소리로 바닥을 구르던 인형은 어느 집 아이를 웃고 울게 만들었다. 꿈틀대는 안마기는 어느 가장의 어깨를 가뿐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아직도 꼿꼿한 무신상은 점집 한 구석에서 누군가의 영감을 더하고 있었을 것이다. 조각 난 전신 거울은 오후가 되면 얼마나 밝게 해를 반사하며 번쩍이고 있었을까…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기능을 잃은 것들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는 물건이 되어 버려지고 쌓여 있다. 쓸모 없는 것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겁이 난다. 나도 곧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그의 작업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 모양이 우습지 않을 것이다.

 

손재주가 좋은 그는 꽤 많은 일을 잘 해왔다. 그리고 일을 잃게 된 후, 마을 하나가 통째로 쓸모 없어진 인천 용현동의 재개발 구역을 돌아다니며 자기처럼 ‘쓸모 없어진 것’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최성균의 상황을 두고 평론가 김홍기는 첫 개인전의 평론을 통해 ‘용현동은 최성균의 정신적 풍경이었고, 최성균의 용현동의 육화 된 정신이었다.’ 라고 썼다. 그렇게 ‘용현동의 육화 된 정신’은 자신의 ‘정신적 풍경’을 바라보고 들어가 체험하면서 저를 닮은 것들을 주워 모았고, 그건 아마도 기능을 잃은 (혹은 잃었다고 여겨진) 스스로를 직시하고 거두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그는 재주 좋은 노동자로서의 기능이 아닌 작가로서의 기능을 다시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가 수집한 폐기물 위에 덧씌운 재료가 깨진 거울 조각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본적으로 거울은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물건이라는 점에서 온갖 폐기물들 위로 깨진 거울 조각을 붙이는 동안 그는 정말 다양한 각도와 형태로 비쳐진 최성균, 본인을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 본인을 폐기물 위에 덧붙여진 거울 조각으로 바라보며 그가 다시 번뜩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거울 조각을 붙여 놨어도 형태는 얼추 유지하고 있으니, 버려지기 전 그것이 어떤 물건이었는지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번엔 대체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다. 거울 조각 위로 날카로운 빛을 쏘고, 수백 개의 빛의 조각들이 전시장을 채운다. 놀이동산 야간개장 불빛이나 클럽의 조명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최성균은 그렇게 다시 기능하는 물건들을 위해 ‘전람회’라는 제목을 제안했겠지만, 어쩌면 이 전람회는 여전히 기능하는 혹은 다시 기능할 수 있는, 재생되었거나 재생될 수 있는 나와 당신이 주인공이어도 상관없겠다. 거울에 비친 당신의 손과 몸과 눈빛이 반사된 불빛처럼 빛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안마기가 있다. 건축 폐기물들이 이제까지의 주된 오브제로 사용된 것과 달리, 안마기는 ‘버려졌으나 여전히 작동하는’ 물건이다. 이건 조금 다른 방식의 ‘재생’이다. 형태와 기능뿐 아니라 가치가 사라진 것들을 위한 ‘가치 재생’의 방향성은 이후 최성균의 작업에 깊이와 숙제를 동시에 제시하게 될 것이다.

함성언(갤러리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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