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오그래피_Choreography

'몸짓(Gesture)' 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방식 중의 하나로 무용예술과 같이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행위들 너머의 움직임의 근본적인 의미를 연구하는 분야에서 그 다양한 표현과 해석의 가능성이 탐구되어왔다. 나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무용이론가인 루돌프 본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의 연구들을 기반으로 무용의 기록체계(Labanotation)와 움직임 분석이론(Laban Movement Analysis)을 가상의 움직임을 창조하는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에 적용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대로 잠들 수 없어

송지원의 작업은 관람객을 남의 일기장을 읽는 사람으로 만들어 공감을 이끌어 내지만 동시에 관람객의 일기장도 꺼내 다시 읽게 만든다. 남의 기억을 통해 나의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는 일견 따뜻한 감정이 오가는 순간일 듯 하지만, 모든 기억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기어이 건드리고 싶지 않거나 되돌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 눈 앞에 맞닥뜨리게도 한다. 안정적으로 쌓여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부의 약한 충격에도 와르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송지원의 총천연색 석고 조각들과 비슷한 구조다. 그녀의 작업은 양가적이다.

리듬_Rhythm

리듬은 ‘흐른다’는 뜻에서 시작된 단어고, ‘운동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더니’, 재현의 대상을 ‘운동의 질서’에서 발견하는 작가 정직성이 직접 지은 전시 제목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당위와 체계를 갖추고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질서의 다른 말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어쩌면 안정감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나름의 동선과 활동폭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엔지니어의 움직임과 그의 손이 닿은 기계의 일정한 움직임은 최적의 위치와 형태로 여전히 올라가고 있는 적벽돌 빌라처럼 보이지 않는 질서를 갖고 있다. 가슴을 두드리며 했던 지난 번과는 다르게, 괜히 배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달라 보여도 여전히 정직성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안경수 개인전 전시 리뷰

풍경을 그리는 작가가 쏟아져 나오는 중에도 안경수는 여전히 풍경을 그린다. 딱히 어느 시점부터라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미술시장의 침체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측은 해보지만) 정확한 이유나 영향을 발견할 수 없는 풍경 그림이 전시장마다 한 번씩은 걸린다. 대체로 ‘심상의 풍경’ 같은 말로 엮을 수 있는 이 풍경 그림들의 공통점은 같은 풍경을 보고 있어도 누가 어떤 상태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읽히기… Continue reading 안경수 개인전 전시 리뷰

FADE, SHADE

여전히 세상은 엉망으로 변하고 있고, 그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지만 그래도 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으며 생겨나고 있는지, 그래서 사회와 시스템은 무섭도록 거대하고 그 안에 있는 나는 그저 바랜 천막 같아서 당장이라도 철거될 것 같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해를 더하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고 아직은 소중한 것인지, 그림을 그린 작가도,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 전시는 읊조리는 기도 같은 것이 된다.

XXX

누벨바그의 위대한 성취 이 후 동어반복과 자기복제가 계속되던 프랑스에 누벨이마주라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영화 문법을 습득한 젊은 영화 감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누벨이마주는 그 한계가 명확한 경향이었지만, 그것은 이제껏 없던 새로운 시도였고 그것으로 이전까지와는 다른 프랑스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점 역시 확실하다. 오용석과 장파는 이미지가 가진 힘으로, 회화 자체가 가진 힘으로 작업을 풀어낼 수 있는 작가들이다. 엇비슷한 풍경들이 양산되는 지금 여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곳을 남다르고 풍요롭게 한다.

Ground Zero

한 사람은 더 깊이 파고들었고, 또 한 사람은 지평을 넓혔다. 수직과 수평의 방향성이 작은 전시장 안에 교차한다. 두 사람이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래프가 한 면 위에 그려질 수 있는 요건도 갖춰졌다. 미적분 그래프를 그릴 때 X축과 Y축이 만나는 지점은 대체로 0이었다. 그렇다면 방향성이 교차하는 이 갤러리는 그래프의 0점이 될 수 있다. 산책을 하며 얻은 첫 번째 힌트가 그들의 작업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면, 차분히 글을 정리하며 그 방향성을 따라 글을 정리하며 얻은 두 번째 힌트는 ‘나’다. 서원영도 이수정도 모두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수직과 수평의 선을 긋고 있었다. 깊어짐과 넓어짐으로 조금 더 ‘나’에게 근접하려는 의지와 노력의 결과물들이 갤러리 안에 있다. 이제 이 공간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공통의 답을 찾으려는 두 작가의 교차점이며, 동시에 가장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는 지점을 의미하는 그라운드 제로_ground zero다.

앞=뒤 展 전시서문

그렇게 둘의 작업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비로서 ‘집’이란 것의 정의, ‘집’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푼다. 강준영의 작업이 쌓이면 김준명의 작업이 되고, 김준명의 작업을 해체하면 강준영의 작업을 볼 수 있다. 집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정의가 모여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집’에 대한 생각을 들쑤신다. 내 삶의 모습을 억지로 다시 보게 한다. 그건 지금 남의 집에 혼자 살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집과 담을 넘어 뒷산으로 뛰어올라가던 여섯 살의 내가 생각하는 집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두 작가가 집 얘기를 하니, 그걸 보고 있던 나는 오랜만에 내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