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는 정류장 앞에 서 있었고 어딘가 어중간한 시장통을 지나 고시원이 있는 건물의 지하 3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고시원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을 누군가와 함께 서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이유도 없이 아렸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이 모여있는 큰 건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을 시커멓게 그리고 있었다. 큰 파도와, 폭발하는 화산과, 아치 모양의 돌다리와 눈 내린 풍경이 온통 시커멓게 그려져 있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것이 오롯이 지금의 나를 위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카테고리: 2015
깊다면 깊고, 얕다면 얕지_The Moment that I feel that I know
폭염_Heat Wave
문득 모로 누워 잠이 든 소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떠올린다. 불타오르는 캔버스와 도로 한복판에 생겨난 싱크홀, 콘크리트 덩어리일 어느 건물의 잔해와는 사뭇 다른 풍경. 잠든 소녀에게는 어떤 분노나 절망, 무력감도 보이지 않는다. 손자국이 찍힌 장미꽃밭을 넘어 흩뿌려진 물감과 분명 언제든 생겨날 수 있는 매끈하지 않은 풍경들 사이로, 소녀는 쉼표처럼 숨 쉴 틈이 된다. 흡, 하고 들여 마시는 숨은 맥박을 느리게 하고 눈에 들어간 힘을 빼준다. 어쩌면 잠든 소녀는 이제의 다른 모습, 혹은 이제가 되고 싶은 이제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근육에 피가 들어차 팽팽해진 상태를 이완시키는, 그래서 분노와 절망과 무력감이 중화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작품 속 이미지가 던지는 거친 질문의 답이 거기 있을 수도 있다.
코레오그래피_Choreography
이대로 잠들 수 없어
헌화가
리듬_Rhythm
리듬은 ‘흐른다’는 뜻에서 시작된 단어고, ‘운동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더니’, 재현의 대상을 ‘운동의 질서’에서 발견하는 작가 정직성이 직접 지은 전시 제목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당위와 체계를 갖추고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질서의 다른 말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어쩌면 안정감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나름의 동선과 활동폭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엔지니어의 움직임과 그의 손이 닿은 기계의 일정한 움직임은 최적의 위치와 형태로 여전히 올라가고 있는 적벽돌 빌라처럼 보이지 않는 질서를 갖고 있다. 가슴을 두드리며 했던 지난 번과는 다르게, 괜히 배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달라 보여도 여전히 정직성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FADE, SHADE
여전히 세상은 엉망으로 변하고 있고, 그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지만 그래도 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으며 생겨나고 있는지, 그래서 사회와 시스템은 무섭도록 거대하고 그 안에 있는 나는 그저 바랜 천막 같아서 당장이라도 철거될 것 같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해를 더하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고 아직은 소중한 것인지, 그림을 그린 작가도,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 전시는 읊조리는 기도 같은 것이 된다.
XXX
누벨바그의 위대한 성취 이 후 동어반복과 자기복제가 계속되던 프랑스에 누벨이마주라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영화 문법을 습득한 젊은 영화 감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누벨이마주는 그 한계가 명확한 경향이었지만, 그것은 이제껏 없던 새로운 시도였고 그것으로 이전까지와는 다른 프랑스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점 역시 확실하다. 오용석과 장파는 이미지가 가진 힘으로, 회화 자체가 가진 힘으로 작업을 풀어낼 수 있는 작가들이다. 엇비슷한 풍경들이 양산되는 지금 여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곳을 남다르고 풍요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