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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그의 위대한 성취 이 후 동어반복과 자기복제가 계속되던 프랑스에 누벨이마주라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영화 문법을 습득한 젊은 영화 감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누벨이마주는 그 한계가 명확한 경향이었지만, 그것은 이제껏 없던 새로운 시도였고 그것으로 이전까지와는 다른 프랑스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점 역시 확실하다. 오용석과 장파는 이미지가 가진 힘으로, 회화 자체가 가진 힘으로 작업을 풀어낼 수 있는 작가들이다. 엇비슷한 풍경들이 양산되는 지금 여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곳을 남다르고 풍요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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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nd Zero

한 사람은 더 깊이 파고들었고, 또 한 사람은 지평을 넓혔다. 수직과 수평의 방향성이 작은 전시장 안에 교차한다. 두 사람이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래프가 한 면 위에 그려질 수 있는 요건도 갖춰졌다. 미적분 그래프를 그릴 때 X축과 Y축이 만나는 지점은 대체로 0이었다. 그렇다면 방향성이 교차하는 이 갤러리는 그래프의 0점이 될 수 있다. 산책을 하며 얻은 첫 번째 힌트가 그들의 작업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면, 차분히 글을 정리하며 그 방향성을 따라 글을 정리하며 얻은 두 번째 힌트는 ‘나’다. 서원영도 이수정도 모두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수직과 수평의 선을 긋고 있었다. 깊어짐과 넓어짐으로 조금 더 ‘나’에게 근접하려는 의지와 노력의 결과물들이 갤러리 안에 있다. 이제 이 공간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공통의 답을 찾으려는 두 작가의 교차점이며, 동시에 가장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는 지점을 의미하는 그라운드 제로_ground zero다.

사소한 흔들림_Trivial Wavering

다만 최희승에게 중요한 것은 모호함 자체가 아니다. 존재와 존재, 나아가 시점과 시점 사이에 모호함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이 양쪽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사유하는 과정 중에 이 모호함이 재현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최희승의 작품에 재현된 이 모호한 공간은 작품 속 계단의 시작과 끝,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암흑물질과 은하의 중력이 상호 작용하여 우주를 진화시키는 것처럼 존재와 존재, 시점과 시점 사이를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가득 채우고 변형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Breaking the waves_파해(破海)

박지혜의 작업은 스웨터에서 삐져나온 실오라기 같아서, 작가의 이야기를 잡고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아주 인간적이고 당연한 그러나 너무 내밀해서 공유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경험과 감정을 작가와 관람객이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거대한 철학적 담론과 호기심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를 통해 모두가 목격했을 법한 사건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은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인다.

이야기+歌…to listen

완전히 다른 장르라고 생각되지만, 의외로 락과 힙합은 적지 않은 협업을 통해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에어로스미스Aerosmith와 런디엠씨Run DMC 는 를 탄생시켰고, 린킨파크Linkin Park 와 제이지Jay-z는 를 만들어냈다. 아예 록과 힙합은 핌프락Pimp rock이라는 장르로 결합되기도 했다. 거기에는 투 베이스와 트윈기타의 날카로움과 힙합의 그루브가 공존한다. 그 장르간 결합의 케미스트리Chemistry가 락을 좋아하는 기획자가 힙합을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를 진행하는 이유고, 목적이다. PEACE!

열림_Omnipresent

한계령 삼거리에서 먼 바다와 금강산을 한눈에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작가가 정작 보고 있었던 것은 서울의 가로수다. 그건 채비를 갖추고 길을 떠나야 만날 수 있었던 풍경을 이제 살고 있는 ‘여기’서 발견할 수도 있었다는 독백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작업의 방향성과 작가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에 자연에서 받던 위안을 이제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노경희에게 ‘열림’은 곧 ‘omnipresent’와 같은 의미일 수 있다.

Dead Line

클레이를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만든 작품에는 지문으로, 혹은 손자국으로 작가의 흔적이 남는다. 수백 개의 작업 모두에 고스란히 남은 ‘마음을 쓴 흔적’은 우리가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이선환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나 육식 문화 자체를 섣불리 비판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나 때문에, 혹은 나를 위해 죽어야 했던 것들에 대한 동정과 이해를 보이려 한다. 어린 시절을 동물과 함께 보낸 작가에게, 죽은 동물을 작업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Pick at a scab

나의 그림은 언제나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최근의 작업에는 잠들기 직전에 본 장면이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강하게 잔상이 남는 꿈의 모습, 별것 아니지만 견디기 힘든 체험 같은 것들이 추가되고 있다. 어렸을 적 열병을 앓았을 때 보았던 환영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발작적인 개의 짖음이나 풀리지 않는 꿈의 모습들은 모른 채 넘기고 싶은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다. 이런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밖으로 꺼내어 놓아야 한다.

상자 안의 고양이

조종성은 렌티큘러 작업을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고, 관측의 방향과 그 결과에 대해 관람객들이 명확한 위치를 갖길 원했던 것. 뚜껑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사회의 규범은 우리를 옭아 매기도 하고, 동시에 보호하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이 중첩된 사회의 모습을 조종성은 한 장의 사진에 담아 보여준다. 무엇을 보고 어떤 상태를 선택할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지는 관람객의 몫이 된다. 이제 상자는 관람객들 앞에 놓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