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들의 생활백서

풀에 대한 관심은 그가 살던 수유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게다. 지금이야 서울 강북구 일대에서 가장 번쩍대는 거리 중 하나가 되어있지만 사실 수유리는 오래 전부터 서울권 등산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동네였을 만큼 산이 가까운 동네였으니까. 다만 어린 김제민의 눈에 비친 풍경을 현재의 작업으로 이어진 유일한 이유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그가 풀의 일생에 인간의 삶을 대입시켜 바라봐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인간과 인간사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뼛 속 깊이 점철된 인간인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평범하고 흔한 사람일 뿐이다. 그의 작품 속 풀은 그렇게 우리를 닮았고, 작가 자신을 닮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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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비전(雜草秘傳) – 초식 24

"잡초 호신술 비전"은 연약한 식물들이 각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마치 무술서의 장면처럼 표현해 본 작업이다. 풀 또는 나무들이 의인화되어 다양한 무술 동작을 하고 있는 이 드로잉 연작은 김을 매려는 누군가의 호미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자신을 베려는 낫을 피하는 기본적인 동작에서부터,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황당무계한 권법 초식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잡초들의 이러한 가련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몸부림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거대한 폭력이나 획일성, 부조리 앞에서 속수무책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